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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독하고 있는 기독교 크리에이터가 있다. 그는 바로 '책읽는사자'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실제 사회에도 관심이 많아 영상을 보며 조언을 얻을 수 있고, 생각치 못했던 것들을 곰곰히 묵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독서를 좋아해서 세미나도 열지만 나는 아직은 추천해주는 책만 되는대로 읽는 중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앙의 참견>이라는 책을 내서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연애와 결혼의 참견', '신앙생활의 참견', '취업과 직장생활의 참견'이다. 연애와 결혼의 참견에서는 배우자 기도, 넌크리스천과의 연애(결혼), 스킨십 및 음란의 문제 등을 다루며, 신앙생활의 참견에서는 고통의 문제, 하나님의 뜻, 소비, 믿음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취업과 직장생활의 참견에서는 사명, 취업준비, 정체성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이슈들을 성경적 관점으로 이야기한다.

 

당연히 책을 읽으며 나도 마찬가지로 뼈를 많이 맞았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다. 또한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주를 따르며 걸어갈 수 있는지 조언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얼마나 갈 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도 안 넘어지는 것도 믿음이지만, 백 번 넘어져서 백한 번 일어 다시 일어나는 것도 믿음이다.

어리석은 크리스천으로 살지 말고 지혜롭고, 세상에 밝게 하고 맛을 내는 빛과 소금으로 살자. 그러기 위해서는 더 성경을 읽고,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 중 하나이다. 나를 통해 오직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책 속 밑줄 긋기

행복하고 감사한 결혼생활은 두 사람의 유사성에 정비례한다. 유사성이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종교이고, 두 번째는 신앙관이다. 이것이 어떤가에 따라 삶의 우선순위가 결정되며 둘의 생각과 습관, 실천이 달라진다. (19p)

 

- 애인과 배우자보다 나와 예수님의 일대일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연애할수록 예배자의 일상이 무너지는 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애가 아니다. 반대로 연애 기간과 결혼 연차가 늘수록 나와 예수님의 관계가 성장하고 성숙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모습이라는 증거다. (20p)

 

- 세상은 사랑을 섹스라고, 욕구의 충족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질투하지 않음과 자랑하지 않음과 잘난 체하지 않음과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음과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음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과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함이라고 말씀하셨다(고전 13:4-6). 나는 이걸 ‘밥 같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또 인간의 유일한 행복은 여기에서 시작되며 완성된다고 믿는다. (22p)

 

- 안타깝게도 배우자 기도는 자신의 취향 저격 리스트가 아니다. 정성과 노력을 다하면 소원 성취를 해주는 요술램프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자기애의 또 다른 표현 즉, ‘우상숭배’다. 내 욕구를 영순위에 두는 나르시시즘의 표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5p)

 

- 올바른 배우자 기도는 하나님께서 날 위해 예비해두신 배우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내 영성의 센서를 거룩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배우자 기도의 본질은 ‘자기 부인’이다. 내 소원이 아닌 예수님의 소원을 이뤄달라는 기도이자 자신이 예수님의 소원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만한 영성을 소유하길 바라는 간절한 문 두드림이다. (27p)

 

- 멋진 오빠와 연애 기간 중에 해외여행 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모텔에 들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주일 예배에 한 번도 안 빠질 자신이 있는가? … 만약 당신이 위 항목에 자신 있다고 생각한다면 축하한다! 그걸 기독교 용어로 ‘교만’이라고 한다! 자각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다. (31p)

 

- 넌크리스천을 사랑하는 게 죄냐고 묻기 이전에, 넌크리스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본인의 영적 센서를 점검해봐야 한다. (45p)

 

- 우리에겐 생명 그 자체인 복음이 그들에겐 배려해줄 수 있는 하나의 도덕적 옵션일 뿐이다. 이게 바로 예수를 존중하는 사람과 예수를 메시아로 따르는 사람의 차이다. 자기 감정과 자기 확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감내해야 할 현실 그 자체다. (59p)

 

- 이들은 나중에는 체내 사정만 아니면 되지 않겠냐고 묻는다. 참으로 구질구질한 의미부여다. 어떻게든 경건해지려는 동기가 아니라 어떻게든 죄를 조금 더 탐닉하고자 하는 동기다. (75p)

 

- 음란물 시청과 자위를 끊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자신의 미디어 콘텐츠 소비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둘째,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즉 평소 자기 뇌의 고착화된 신경회로가 아닌 ‘새로운 신경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 둘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습관을 바꿔야 한다.” (90p)

 

-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음란물 시청과 자위는 당연히 끊어야 할 죄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음행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게 죄를 짓는 것”(고전 6:18)이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고전 6:19)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성전”(고전 6:19)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음란물 시청과 자위를 끊고 이겨내야 한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림은 크리스천의 엄중하고 거룩한 책무이다. (91p)

 

- 남에게 보여주는 공적인 모습이 당신의 인격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남은 흔적이 실제 당신의 인격이다. 내가 검색하는 게 곧 나고, 내가 보는 게 곧 나 자신이다. (92p)

 

- 대개 음란물 시청과 자위를 끊기 위해 ‘음란물을 끊어야 해’, ‘음란물을 절대 안 볼 거야. 나 자신과의 약속을 무너뜨리지 말자’, ‘이 사진(또는 영상)을 보니 음란물을 보고 싶지만 참아야 해’라고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게 음란물과 자위를 묵상하는 꼴이다.

프레임 이론의 창시자 조치 레이코프는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되새기는 게 오히려 그 생각의 영향을 강화시킨다”라고 말한다. (93p)

 

- 그리스 이성철학이 기반인 계몽주의적 공교육과 사회 시스템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뭐든(본인의 지적 수준에 제한되지만) 이성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하는 일종의 강박에 시달린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어떻게든 본인 이해력 수준으로 잡아 내리려 한다.

비록 지금은 이해되지 않으나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믿고 순종하고 인내하겠다는 개념을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 신앙이 인스턴트화 되었다. (112p)

 

-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의 정교함과 겸손하심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니 신앙 안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이 있다면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그만이다. 마치 크게 싸운 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각자 갈 바를 갔듯. (119p)

 

- 밥 먹을 시간이 있으면 성경 읽을 시간도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포털사이트 랭킹뉴스 등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여다볼 시간이 있으면 수많은 건강한 복음 콘텐츠를 소비할 시간도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복음을 거절하고 무관심을 ‘선택’한다. (128p)

 

- 왜 이런 고통이 내게 찾아왔는가를 묻기보다 이를 통해 어떻게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날 건가를 고민해야 옳다.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는 고속도로다. 고통이 주는 순결한 유익이다. (129p)

 

- 창작가가 정성을 쏟는 작품일수록 그 작품이 아무리 괴로워한들(?) 자신의 마음에 흡족할 때까지 수정하고 교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작품이다. 우리의 고통은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다워’지는 과정이다. 처절한 아름다움, 그것이 고통이다. (131p)

 

- 중요한 건 고통의 이유를 아는 것보다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닌 믿음이다. (134p)

 

-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왜’라는 질문은 아무도 확실히 대답해줄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우리 각자를 향한 그 계획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그분의 지혜와 자비를 신뢰할 뿐이지요. … 우리는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폴 켄고르(Paul Kengor). <레이건 일레븐>, 68,69쪽 (136p)

 

- 나만 위해 쓰는 사람이 있고 남을 위해 쓰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비도 영성이다. 소비는 그 사람의 우선순위와 실제 선택과 실천이 그대로 반영되는 ‘영혼 영수증’이다. (150p)

 

- 이 세상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할 순 없다. 그래서 신앙적 소비생활의 대전제는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이 결단의 순수한 표현 방식 중 하나가 바로 헌금이다.

그럼 왜 하필 돈일까. 우리가 돈을 제일 사랑하기 때문이다. (151p)

 

- 요즘 ‘패완얼’이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패션의 완성은 ‘영혼의 거룩’이다. (168p)

 

- 물론 아무리 반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창작자가 작품을 만들어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안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그 작품을 통해 실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가장 끔찍한 형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구속해주신 복음의 역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십자가 형틀 자체가 선하다고 인식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176p)

 

- 예술은 원래 우리 거다. 악해서 피해야 할 곳이 아니라 가서 정복해야 할 우리의 땅이다. (180p)

 

- 영화를 포함한 각종 문화 콘텐츠를 분별해서 보려면 먼저 ‘온전한 분별력’을 갖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이 중요하다. 어려워할 것 없다. 성경을 읽자 설교를 많이 듣고 기독교 서적도 많이 읽자. 복음 콘텐츠에 자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노출시켜라.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의 법칙이 살아 숨 쉬게 하라. (181p)

 

-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는 환경 탓만 하기보다 주어진 하루에 의미와 품격을 부여하며 자기계발적 삶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사명을 이룰 역량이 자라난다. 내 기질과 적성, 재능을 발견할 확률은 당연히 높아진다. (208p)

 

- 예배자의 삶에 대한 건강한 균형을 간과하면 안 된다. 사람은 자기의 지식수준만큼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210p)

 

- 사명(=하나님이 내게 주신 임무)은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만들어가시는 이야기다. 내 하루가 이미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기적의 퍼즐 조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명은 자각하는 것이다. (212p)

 

-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무엇을 하든 일단 허락을 받으라고 하셨는가? 아니다.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 빼고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 강탈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심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216p)

 

- 첫째, 자신의 여건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도전하며 둘째, 자기 미래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거다. 우리는 크리스천 회사원, 창업가,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 또 (꼭 복음을 직접 전하지 않더라도) 맛있는 식당 주인, 웹툰 작가, 영화감독, 인기 유튜버도 되어야 한다. (219p)

 

- 많은 청년이 크리스천의 책무를 오해한다. 본인이 성실히 습득하고 훈련해야 할 실력의 영역까지 신앙을 핑계로 요행을 바란다. 당연히 해야 할 최소한의 자기계발은 등한시하며 교회만 열심히 다니는 걸 영성이라 착각한다. 그건 믿음이 아닌 무지와 게으름이다. (228p)

 

- 교회 안 고인물처럼 살지 말자.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교회는 눌러앉아야 할 집이 아닌 거쳐 가는 주유소다. 우리는 세상에 들어가 소금의 짠맛을 내고 밝은 빛을 발해야 한다. (231p)

 

- 세상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독서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는 직장인이기 전에 어둠의 권세 잡은 자와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이다. 독서하는 마음의 동기 자체가 다르다. 예수님의 부활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세상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더욱 논리적인 복음의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독서해야 한다. (2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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